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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및 신라선원 > 시조대왕시조왕 박혁거세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으로 기원전(紀元前 BC)69년 7월에 탄강(誕降)하시고 서기 4년 3월에 향년 73세로 훙서(薨逝)하시었다.
시조왕(始祖王)의 성(姓)은 박(朴)이요 휘(諱)는 혁거세(赫居世)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국호(國號)는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며 61년 동안 왕위에 오르셨다.
왕비(王妃)는 알영(閼英)부인으로 기원전 53년 4월에 왕비가 되어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시조왕께서 훙서(薨逝)하신지 7일 뒤에 하세(下世)하시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시조왕의 탄강기(誕降記)에 대해서 적기를, 경주지방에 6촌(六村)이 있었는데,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중턱에 있는 나정(蘿井) 곁 숲속에서 말(馬)한 필이 소리높이 울고 오색(五色)구름이 떠오르는데 신선인 듯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비치는지라 이상하다 생각되어 얼른 가서 보니 말은 간곳 없고 다만 한 포태(胞胎)가 알(卵) 같기도 하고 박처럼 생기기도 한 것이 있어 그 포태를 헤쳐보니,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단정(端正)하므로 양육(養育)하니 십여 세의 나이에 벌써 기골이 준수하고 대인의 기풍이 있으므로 6부 촌장들이 모여 의논 임금으로 추대하여 시조왕에 올라 경주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니, 기원전 57년(漢宣帝5 鳳元年甲子)의 일이요. 시조왕의 보령(寶齡) 13세 때의 일로 뒷날의 신라국(新羅國)이다.
알영(閼英)왕비는 마음이 어질고 착하시어 내조를 잘 하였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왕과 왕비를 말하여 두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시조왕은 기원전 41년(庚辰)에 왕비 알영부인과 함께 6부를 순무(巡撫)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였다.
시조왕 19년(기원전 39)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으며, 시조왕 21년(기원전 37)에 경주 도읍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시조왕 30년(기원전 29)에 낙랑(樂浪)이 침입하여 왔으나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다”하고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물러갔다. 재위(在位) 61년 되던 해 서기 4년(甲子) 3월에 훙서(薨逝)하시니 경주(慶州)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훗날에 알영왕비와 남해왕(南海王), 유리왕(儒理王), 파사왕(婆娑王)을 같은 경내에 장사 모시니 지금의 오릉(五陵)이다.
경주 오릉
일찍이 기원전 6년 9월에 좌명공신(佐命功臣) 6부 촌장과 개국공신(開國功臣) 20여 명을 거장전(擧章殿)에 초청하여 만복연(萬福宴)을 베풀어 군신간의 정의(情誼)와 공덕(功德)을 기리신 바 있었는데, 후세에 와서 그 일이 거장보(擧章譜)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세종(世宗) 11년(1429) 7월에 오릉 옆에다 시조왕의 묘전(廟殿)을 건립 숭덕전(崇德殿)이라 하고 춘추중월(春秋仲月, 2월, 8월)에 향축(香祝)과폐백(幣帛)을 내려 제향(祭享)토록 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묘전(廟殿)이 불타 소실되었으나, 다행이 위판(位版)은 당시 묘전(廟殿)의 수복(守僕) 박언수(朴彦秀)가 시조왕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경주 선도산(仙桃山) 성모사(聖母祠)로 피난하여 그 신위를 고이 모셔 보전(保全), 무사하였다.
경종(景宗) 3년(1723) 6월에 시조왕의 묘호(廟號)를 숭덕(崇德)이라 사액(賜額)하여 다음 달인 7월 22일에 사액 현판을 걸었다. 이로부터 처음으로 전참봉(殿參奉)을 두어 향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현대문명에 이르러 현대사학자들이 연구발표하여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2005년 6월 24일) “신라건국 사실을 나정은 알고 있다”에서는 시조왕 박혁거세의 탄강신화를 요약하여 정리하기를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는 북방 기마민족(騎馬民族)의 후예로 경주지역 나정으로 이주해 온 사람이라 했다. 이 시절 강력한 철제무기와 기마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이주(移住)해 온 박혁거세는 경주의 6촌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새로운 국가를 열었다. 신라는 그렇게 시작됐다”하였다. 또한 알영부인의 탄강 사실을 두고는 삼국유사에 적기를 알영정(閼英井)에 용이 나타나 오른쪽 갈비뼈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우물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고 불렀다. 자라면서 덕기가 있었으니 왕이 이를 듣고 왕비로 삼았다 하였으며 위에서 기록한 것과는 달리 삼국사기에 적은 신라의 건국신화를 이렇게 해설하여 전하기도 한다.
“나정(蘿井) 숲에서 말이 울고있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 났는데 6촌(六村)사람들이 그 출생을 신기하게 생각해 높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하였으며, 선도산(仙桃山)의 성모사(聖母祠)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서 “성모(聖母)는 중국황제의 딸이라 하였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곧 박혁거세(朴赫居世)다”라고 하였다.
나정비각(蘿井碑閣)(시조왕께서 탄생하신 장소)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신라(新羅)의 시조왕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탄강(誕降)하신 곳을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운 곳이다.
서기 기원전 70년, 그 때에는 지금의 경주가 진한(辰韓) 땅이었는데 고조선(古朝鮮)이 망하자 그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경부 부근의 바닷가나 산 속에서 6개의 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임금은 없었고 촌장(村長)들만이 있었다.
이를 걱정하던 촌장들은 3일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양산(楊山) 쪽을 바라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나정(蘿井)에서 오색(五色)의 구름 속에 용마(龍馬)가 크게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선인(仙人) 한사람이 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박과 같이 생긴 포(胞)가 하나 놓여 있어서 깨 보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아기가 후일에 시조왕이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고 동천(東天)으로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모양은 예쁘고 단정하게 생겼는데 옆에 있던 새나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어 아기의 탄생을 즐거워했다.
나이 13세가 되어 어른같이 숙성(熟成)해지자 6촌장들이 추대(推戴)해서 왕으로 모셨다.
나정의 비문은 경상도 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경주부윤(慶州府尹) 최중헌(崔重獻)이 제목글자와 비석의 글자를 썼고 후손들이 돈을 내어 세웠다.
사진은 1997년에 촬영한 모습이고 현재는 나을신궁(奈乙神宮) 복원(復原) 공사를 위해 비각을 헐어낸 뒤 이 일대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숭덕전(崇德殿)
신라 시조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묘전이다. 남해왕 3(서기 6)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사시로 제사를 받들었고 친누이를 주제토록 하였다. 유리왕 원년(서기 24)에는 시조묘를 전배하고 죄인을 특사하는 것이 살례가 되었다. 신라 제21대왕인 소지왕 9(487)년에 지금의 나정 옆에 신궁을 세워 새로이 즉위하는 임금은 반드시 신궁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신궁의 이름을 나을신궁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후 조선 세종 11(1429)년에 오릉 동편에 묘전을 창건하고 위전 오결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양민 여섯 집에 세금을 면제하여 수호하게 하고 나뭇꾼과 우마의 방목을 금지하고 춘추로 중월에 향축과 폐백을 내려 보내서 제사를 봉향하였다.
그러나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 때 묘전이 불타버리고 위패만 서악의 선도산 성모사에 봉안하여 다행이 화를 면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선조 35(1601)년에 묘우를 다시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수호관을 두었다. 그뒤 18년 후인 1618년에 묘우를 중건하고 숙종 30(1704)년에 다시 중수하여 경종 3(1723)년에 비로서 후손으로 하여 참봉을 두어 수호하도록 하였는데 성손유생 91인으로 윤직하게 하였으며 이해(1723년) 7월 22일에 예조에서 묘호를 숭덕전으로 사액을 하였다. 그리고 영조 37(1761년)년 11월 2일에는 경주부윤 홍양한이 왕명을 받들어 위패에 왕(王) 자를 쓴 신라 시조왕의 묘전이다.
광무황제 즉위로 국호 및 연호를 고치고 새로이 축문을 내려 춘추대제때 상향축문으로 받들었으며, 건국 24(1971)년 8월 27일에 사적 172호로 지정되어 예손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문중 성손들과 합심협력하여 사상 유례가 없는 대성역을 이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매년 3월 춘분일에 춘분대제를 봉향하고 있다.
신라박씨(新羅朴氏)
박씨는 조상을 달리하는 본관이 단 한 본도 끼어 있지 않고 오직 박혁거세의 순수한 혈족을 이어온 씨족이라 할 수 있다.
박씨의 본관은 여러 성씨 중 시조 또는 중시조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고 또 후손이 현존하는 확실한 본관 35본만 기록했다. 문헌에 의하면 우리나라 씨족 가운데 외래 귀화 씨족이 많지만 박씨는 조상을 달리하는 본관이 단 한 본도 끼어 있지 않고 오직 박혁거세의 순수한 혈족을 이어온 씨족이라 할 수 있다.